한국 근현대사와 민족주의 07 - 제국주의 침략과 민족주의 활로 part.1 한국 근현대사

part.1
수업 교재

※ 학부 시절 들었던 한국 근현대사 교양수업(서울대학교 권태억 교수님의 '근현대 한국민족주의' 강의)의 노트를 정리해서 포스팅합니다. 포스팅 제목은 '한국 근현대사와 민족주의'로 하며 부정기적으로 연재합니다. 서술이 미흡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나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 주십시오. 언제든 감사, 환영합니다. 내용상 오류가 있다면 전적으로 노트 필기를 잘못한 저에게 책임이 있지, 권교수님께 있지 않음을 분명히 밝혀 둡니다.
  이 포스팅은 수업 필기를 정리하여 옮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 특성상 번호가 매겨진 순서대로 보셔야합니다. 역순으로 보는 걸 삼가주시고 우측의 한국 근현대사 카테고리를 클릭해서 차례대로 읽어 주십시오.

한국 근현대사와 민족주의 07

  ※ 수업 시작 전 교수님의 말씀

  교수들하고 아침에 모임하느라 5분 늦었는데 별 일은 아니고 '일본어로 진행되는 강의' 신설에 대해서 인문대 교수들끼리 모여서 토론한 거였습니다. 영어 강의도 있고 독어 강의도 있고 불어 강의도 있는데 일어 강의가 없어야 될 이유가 없어서 나는 찬성인데... 다수결로 표결한 결과 반대가 더 많아서 일어 강의는 신설이 안 될 걸로 보이네요. 반대하는 교수들이 아직은 국민정서상 시기상조라 하는데, 모르겠어요 저는. 배울 게 단 하나라도 있으면 가르치는 사람이 일본인이든 뭐든 상관하지 않고 배워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나는 한일병합 원천무효를 주장하는 교수들 명단에 이름이 들어가 있는 사람이에요. 마냥 좋아서 일본어 강의를 신설하자는 게 아니란 말이죠.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교수면 한국에서 그래도 최고로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시기상조라는 결론을 내고 있으니 뭐랄까요 좀 안타깝습니다. 그러면 수업 시작하죠.

  <제국주의의 침략과 한국 민족주의의 활로 모색>

  0. 개관

  개항 이후 본격화된 외국 상인 세력의 경제활동 증대로 몰락이 더욱 가속화된 농민층이 일으킨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은 조선 후기 이래로 성장하고 있던 농민들의 저항 의식이 표출된 운동의 최고봉이었으나, 큰 희생만 남긴 채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일본과의 투쟁에서 농민들이 다수 희생되면서 저항적 민족주의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한국 민족주의 역사에 있어서는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일어난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하고 동아시아 일대는 일대 파란을 겪게 되는데, 중화질서는 이제 무너지고 서양 근대 국제질서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일본이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등장한 것이다. 또 청의 몰락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서구 열강의 간섭도 한층 강화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국권을 무력화시키면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권을 수립하여 조선의 국정을 전반적으로 대륙 침략에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려 했다. 또한 분출된 농민층의 개혁요구를 어느 정도 수렴하여 조선의 지배세력으로 자리 잡는데 기반을 쌓으려고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궁궐을 점령하였고 러시아와 접촉하려는 민씨 일족을 제거한 가운데 갑오개혁이 이뤄졌다. 갑오개혁은 구성원의 평등과 근대화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의 발달에 도움이 된 측면과, 일본 제도의 이식으로써 제국주의 침략을 도왔던 측면이 모두 있다.
  광무개혁은 농민군의 진압이 끝난 상황에서 황제권을 강화하고 황실의 주도 아래 구본신참을 원칙으로 자주화와 개혁을 지향한 것이다. 황제권 강화라는 점은 성격상 보수적이지만 그 외에는 갑오개혁의 성과를 대체로 이어받았다. 하지만 농민층과 소상인층에 대한 중과세를 재원으로 하여 행해진 개혁이라는 결정적 한계를 지니고 있는 반쪽짜리 개혁이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국내의 지지 기반이 좁았고 주권재민에 입각한 입헌민주국가로서의 전망을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독립협회 역시 왕권을 강화하고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며 국권을 강화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적이었고 대한제국과 상호 보완적이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은 매우 안일했으며 문물 도입 지상주의적 성격을 띠었다는 점은 그들의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1871 일본은 조선의 자주성을 선언했는데 이는 조선을 지배할 때 청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강화도 조약에서 일본과 조선은 대등한 국가라고 적은 것도 이와 같은 뜻이다. 임오군란 이후, 일본은 ‘조선은 일본의 속방’이라고 공식적으로 주장하며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본은 원래 1868 메이지 유신부터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써 조선을 먹어치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시 개화파들은 서구의 국민주권을 배우기 위한 모범으로 일본을 모방하는 것을 생각했는데 일본은 이를 눈치 채고 개화파들을 이용했다. 개화파 역시 정권을 잡기 위해 일본의 힘에 편승했다. 결과적으로 개화파들이 농민 기타 다수 대중들과 연계되지 못한 상태에서 농민들의 인권을 신장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일본의 제도를 도입하는데 노력을 기울였으므로 당시 국민들은 개화파를 단순한 친일파로밖에 보지 않았고 그들의 개혁은 여론의 지지나 동의를 받을 수 없었다. 이것은 한국 근대사의 비극들 중 하나라고 본다.

  1. 갑오 동학 농민전쟁

  민족주의 발달을 촉발시킨 농민층의 민족으로서의 자각 및 결집.

  (1) 동학의 민족적 성격

  최제우조선 민족 모두의 평등침략 반대를 내세워 농민과 천민은 물론 일부 유생들까지 광범위한 계층에서 공감대를 이뤘다. ‘인내천’ 사상은 신분제도, 적서차별, 남녀차별 등의 사회적 차별을 부정하는 평등주의.

  (2) 농민전쟁의 전개

  1) 교조신원운동

  ※ 보은 관아 통고
  “지금 왜양의 적이 뱃속까지 들어와 어지러움이 극에 달했다. 실로 오늘의 서울을 보건대 필경 오랑캐의 소굴이 되었다. 임진왜란의 원수와 병인년의 수치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찌 설명할 수 있으며,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2) 고부민란
  3) 제1차 농민전쟁(전주)
  가. 경과: 안핵사의 횡포, 전봉준이 봉기 제안하자 고창, 태인, 김제, 금구 등에서 8천여명의 농민군이 결집. 전봉준은 고부 백산에서 농민군을 모으고 호남창의대장소를 설치.
  나. 농민군의 주장: 삼정문란 타파, 일본 상인 세력의 횡포를 철폐
  4) 집강소: 농민군의 군마, 군자금 등을 관리하는 행정기관의 성격. 전라도 56개 고을 중에서 나주를 제외한 52개 고을에 설치됨.

  ※ 폐정개혁 12개조
  신분제 폐지, 지주전호제 개혁이 핵심. 전봉준과 김개남은 "원통함을 푸는 것에서 더 나아가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개혁을 위하여" 집강소 활동을 전환하는데 합의.

  ※ 한편 이 당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의 고향 영남에서는?
  영남의 농민들은 북접 교단에 속해 있었는데 북접교단은 질서를 준수해야 한다는 원칙하에 포교활동을 중시하며 무장 봉기에는 부정적이었음.

  5) 농민군 2차봉기
  제2차 농민전쟁은 보국안민의 실현이 목적. 그러나 그 내용은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① 백성의 뜻을 왕에게 직접 전달하겠다는 의식
  ② 대원군의 섭정을 기대하던 것을 포기
  ③ 일본군을 몰아내는 것을 제1차적 목표로 함
  1894.9.18. 일본군은 자신들이 직접 농민군을 진압하겠다고 나서고 21일 개화당 정권은 이를 허락한다. 이후 농민군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이 시작됨.

  ※ 동학농민운동의 민족주의적 성격
  왜국화를 반대하는 의식의 발현이었으며 당시 왜국의 앞잡이로 인식되었던 개화세력에 의한 국권의 허약화에 대한 분노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농민의 사회적 해방의 의지가 ‘척왜, 척화를 쟁취하는 주체로서의 한국 주민의 집결’로 나타났는데 이는 유교적 정치 이론을 벗어나 근대적 민족으로서의 결집으로 나아가는 의식의 단초를 마련한 것이었다.

  2. 갑오개혁

  갑신정변 당시 이루지 못했던 개혁을 일본의 힘을 빌려 이루려고 함. 조선 사회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엎는 개혁이 이루어져 한국 근현대의 제도, 법령, 문물의 기원을 여기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지배하기 위하여 경복궁 근처에 일본군을 주둔시켰다. 민비는 러시아와 손잡고 일본세력을 견제하려 했으나 일본은 민비를 살해한다. 민비가 살해되자 고종은 경복궁을 탈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궁궐에 들어와 있던 미국 선교사들이 이 시해사건을 외부로 알림.
  왕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고 왕비는 살해되고 그 소식조차 선교사들을 통해서 알리는 지경에 이르니 국민들은 나라를 바로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지식인 계층과 유생들은 땅에 떨어진 국가의 자존심을 되살리고자 했고 독립협회를 만들어 자신들의 견해를 널리 포고함과 동시에 영은문을 허물고 독립문을 건립했다.

  (1) 군국기무처 주도기

  거의 매일 회의를 열며 설치 후 3개월간 208건의 강목을 실시하고 정치ㆍ경제ㆍ사회ㆍ관제 등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했다.
  1) 정치
  일본식 관료제도를 도입. 양반 중심인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운 관리 임용방법을 도입. 문무를 구분하지 않고 인재를 등용. 국왕의 권한은 약화. 일본의 궁내부 내각 중심체제와 비슷하게 바꿈.
  2) 경제
  재정의 일원화. 백성을 수탈하던 여러 가지 무명세를 폐지할 목적이었다. 재정에 관한 모든 사무와 왕실 사무의 경비까지도 탁지아문에서 일괄적으로 관장하게 함.
  신식화폐제도를 정하여 은본위제를 채택. 다만 ‘외국화폐와 혼용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일본화폐가 국내에 유통되게 한 결정적 역할을 했다.
  3) 사회
  신분제 타파를 위해 천민을 폐지. 인신매매 금지, 고문과 연좌제 폐지, 의복제도 간소화. 갑신정변 때 계획된 근대사회로의 전환이 갑오개혁 때 이뤄짐.

  (2) 갑오개혁 2기 이후

  일본은 처음에 갑오개혁을 배후에서 지원하다가 청일전쟁에서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조선의 내정에 직접 관여하기 시작,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 대원군이 동학군 및 청군과 내통한 사실을 들어 그를 정계에서 쫓아낸 후 박영효, 김홍집 등으로 구성된 내각을 수립함. 이 때 군국기무처가 폐지되었으며 홍범 14조가 반포됨.

  (3) 갑오개혁의 성격

  근대화를 앞당겼던 측면도 있으면서 일본의 침략을 쉽게 만들어 주었다는 부정적 측면도 있다. 단 이 시기에 이뤄진 개혁들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는 점에서 부정적 측면을 과장해서 평가할 필요는 없다. 갑오개혁은 민권을 중시하고 신분제를 제도적으로 타파(신분적 사고방식까지 거의 완전히 해체된 것은 6.25 전쟁 이후)하는데 힘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민족주의 발달에 많은 역할을 했다.

한국 근현대사와 민족주의 07 끝

덧글

  • 2011/07/10 14:27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남법사 2011/07/10 16:47 #

    천황개새끼
  • 댓글돌이 2011/07/10 14:57 #

    잘 읽었습니다
  • 남법사 2011/07/10 16:47 #

    이런 '읽었다' 댓글이라도 달아주시는 분이 진짜 고맙더라구요
    감사합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통계 위젯 (화이트)

22
99
383960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화이트)

107